2012년 5월 19일 토요일

요한복음 2장 13-25절을 마치고

오늘 모임에서 마지막 마무리를 모두 나누지 못했습니다. 다음 시간부터 시간 조절을 잘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공부하면서 마지막 단상으로 나누고 싶었던 글을 이곳에 올립니다. 하목사.


예수님의 성전정화에 대한 말씀을 마치면서 몇 가지를 함께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첫째로, 본문의 주제 그대로 성전의 참된 의미 그리고 본래의 역할입니다. 성전을 오늘날의 교회로 바꿔 말해도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교회의 모습은 많이 혼란스럽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교회 본래의 목적에서 많이 빗나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질주의, 상업주의가 교회에 스며들어왔습니다. 소와 양 그리고 비둘기를 파는 행위들이 오늘날 교회에서도 쉽게 발견됩니다. 돈을 바꾸는 것에서 보듯이 물질주의가 교회에 만연해있습니다. “나의 아버지의 집을 시장판으로 만들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마음에 사무칩니다. 교회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면 채찍에 맞고, 쫓겨나고, 판이 뒤엎어지는 일을 그대로 당해도 괜찮습니다. 교회는 정화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분노하셨듯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에도 분명히 분노하실 것 같습니다.

“성전에 대한 남용 및 오용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잘못 사용하고 있으며 그것들을 가치없고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엄숙히 제시하는 바입니다…사고파는 일이 성전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사람들의 주목적이 물건을 성전 안으로 가져와서 장사하는 데 맞추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들이 번 돈으로 배가 불렀습니다…. 이 모든 것을 참으로 순전한 남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양과 소와 비둘기 그리고 환전상들을 봅니다.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 밖에 있게 된 이유입니다. 저들은 ‘그것이 만일에 기독교라면 우리는 그것에 흥미가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마틴 로이드 존스 <요한복음강해>-

둘째로,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성령님이 거하시는 우리들도 곧 성전입니다. Sanctuary – 즉 거룩한 성소입니다. 우리들 안에는 정화되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비본질적인 것들, 성전의 본래적인 모습에서 왜곡되고 나중에 스며들어온 부끄러운 모습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지금 내 모습이 중요합니다. 우리들 역시 정화대상입니다. 스스로 정화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회개입니다. 청산입니다.

셋째로, 우리들 신앙의 대상인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인식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청산하시는 예수님과 직접 대화를 나누었지만 예수님의 본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아집과 전통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가나혼인잔치에 이어서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성경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믿었습니다. 이처럼 같은 사건을 두고도 반응이 제 각각입니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어디를 지향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자신의 아집과 전통을 지향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성전을 헐어버리시고, 사흘 만에 다시 세우시겠다는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처럼 자신을 태우는 주님의 열심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격렬한 대결에서 폭발하는 그 분의 마음의 열망은 아버지의 영예, 곧 성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의해 손상되고 있는 아버지의 영예에 대한 열심 때문에 더욱 불타오른다. (BST 요한복음 강해, 89>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서 새로운 세상을 펼쳐 보이셨음을 인정하고 새로운 생명과 진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믿음임을 기억합시다.

바로 전 본문인 요2;1-12에서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게 하신 예수님은 축제를 가져다 주셨습니다. 반면에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예수님은 꽤 무섭습니다. 공의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말씀대로 충격적인 대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의로운 분노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성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밝히 드러내시는 예수님을 확실히 믿고 우리의 신앙의 초점을 예수님께 맞추기 원합니다.

23-25절에 나오는 말씀도 우리에게 귀한 깨달음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과 하신 일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신용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 믿다 (pisteuw)라는 동사가 세 번 반복됩니다. 1) 제자들은 믿었습니다. 2) 백성들도 믿었습니다. 3) 예수님은 백성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과 하시는 일을 보고 믿는 일종의 가짜 믿음을 간파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신할 것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 그분을 메시야/구세주로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사는 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기도응답이 되는 여부에 따라서 믿음이 흔들리고, 여전히 소와 양 그리고 돈 바꾸는 것에 집착하는 신앙은 바뀌어야 합니다. 신앙의 본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표적을 넘어서 예수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믿고, 제자의 삶을 살아가려는 결단입니다. 그 분 앞에 잠잠히 무릎 꿇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는 것이 우리가 날마다 걸어가야 할 신앙의 여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