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마지막 전체모임이 University Church에서 열렸습니다. 김남근 형제님, 김수경 자매님 조에서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오뎅국과 야채볶음을 함께 먹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빠진 분들이 좀 계셔서 아쉬웠지만 새로 오신 분들이 계셔서 그 분들과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특별히 몸이 안 좋은 이시언 어린이, 최나연 어린이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다음번에는 성하염 자매님의 파마하신 모습도 보고 싶네요. ㅎㅎ
이현옥 자매님과 이수경 자매님의 섬김으로 찬양을 드리고 하시용 목사님께서 요한복음 14장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1절에서 14절까지 말씀을 보았는데요.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 속에서 예수님께서 따뜻하게 제자들을 안정시키시고 나를 믿으라고 하시고 제자들의 엉뚱한 질문도 친절하게 대답해 주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내 이름으로 구하라, 나보다 더 큰 일을 행하리라 등의 유명한 구절들이 있었는데요. 이 구절들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구하라, 나보다 더 큰 일을 행하리라는 복음 안에서 예수님의 사역의 근본적인 목적 안에서 이해해야 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질의응답 시간도 가졌는데요. 믿음과 앎에 대해서 - 목사님께서 벌써 포스팅을 올려주셨어요 - 기도에 대해서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던 질문에 대해 같이 이야기하고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서 좋았습니다.
2월 1일은 소그룹으로 모입니다. 요한복음 14:15-31을 공부합니다. 소그룹에서 깊은 나눔과 교제의 시간을 가지시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2013년 1월 30일 수요일
2013년 1월 26일 토요일
오늘 공부를 마치고: 믿음과 회의에 대해서
오늘 말씀 시간에 책을 잘못 소개했습니다.ㅠㅠ <회의하는 용기 (God in the
dark)>라는 한국말 제목의 책은 오스 기니가 지은 것이고,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책은 <회의에서 확신으로(Doubt, handling it honestly)>입니다. 이왕 얘기가 나온 김에, 오늘 나눈 요한복음 14:1-14말씀은 물론 Q&A시간에 나눴던 대화들의 보충자료가
될만한 내용을 두 책에서 옮겨왔습니다. –하목사-
믿음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성실하심과 미쁘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격려와 인도하심을 받고 성령의 감화와 위로를 체험하게 됨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믿음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 본질상 이해를 갈구하기 마련입니다.
셋째로 믿음은 순종입니다. 바울은 믿음이 우리의 행동에서 드러나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믿어 순종케 하는 것”(롬1:5)에 관해 말하였습니다. 조셉 어디슨(Joseph Addison)은 “믿음은 우리 안에 살아 있어서 생각보다는 실천으로 힘을 모은다”고 말했습니다.
믿음은 철근 콘크리트와 같습니다. 강철 틀로 고정된 콘크리트는 일반 콘크리트와 비교해서 훨씬 더 큰 압력이나 압축에서도 잘 견딜 수 있습니다. 이해로 인해 더욱 강화된 믿음은 어떠한 압력하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믿음은 인간의 몸과 뼈와 같습니다. 마치 인간의 골격이 육체를 지탱하고 육체의 모양을 형성하고 강화하듯이 이해는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지지하고 모양을 형성해 줍니다. 골격이 없다면 인간의 몸은 가벼운 무게에도 버틸 수 없습니다. 몸이 성장하고 적절한 기능을 하려면 살과 뼈가 모두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체험의 활력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체험의 활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계속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믿음을 이해로 강화시키십시오. (회의에서 확신으로, 25-28)
회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워하고 민감하게 느끼는 주제입니다. 그들은 회의를 부끄럽고 불충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심지어 이단이나 되는 양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회의란 말은 입 밖에도 꺼내서도 안 되고 심지어 꺼낼 수도 없는 것처럼 취급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꾹꾹 눌러 놓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반대의 함정에 빠지기도 합니다. 즉 완전히 회의에 사로잡혀 삽니다. 회의가 그 사람을 압도해 버립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만 온통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회의는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위와 같은 방식으로 다룰 수가 없습니다. 적극적인 관점에서 볼 때, 회의는 영적 성장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회의는 당신의 믿음을 테스트하고 그것의 약점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또한 당신의 믿음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하도록 기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무조건 믿는다는 식의 태도를 벗어 버리게 합니다. 회의는 당신을 자극하여 당신과 하나님의 관계의 기초를 더욱 공고히 다지도록 만듭니다. (회의에서 확신으로, 143)
기독교 신앙의 영광스러운 일면은 그 핵심에 인격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다…회의에 대한 건강한 이해는 믿음에 대한 건강한 이해와 나란히 짝을 이뤄야 한다…믿음이 회의의 부재는 아니지만 그러나 회의의 그림자 너머에 진정한 믿음의 확신이 존재한다.
첫째, 회의에 대한 건강한 이해는 오늘날 쓸데없이 만연한 신앙 붕괴에 대해 방벽역할을 한다. 가장 해로운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회의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회의에 대한 솔직함과 회의의 해법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달려져야 한다.
둘째, 회의에 대한 건강한 이해는 장차 분명히 다가올 시험의 날에 대비해 우리를 준비시켜 준다. 진정한 의미에서 믿음이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이해에서 태동한 확신이며, 하나님의 실체와 말씀과 행위의 진리에 견고한 기초를 둔다. (회의하는 용기, 15-19쪽)
일심의 믿음이라 해도 우리의 믿음이 실패하지 않으리라고 우리는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두 마음이 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누릴 수 없고, 그분을 의지할 수 없을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에 대한 우리의 회의의 시각보다 더 확실하시고 더 신실하시며 더 은혜로우신 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더 알수록 자신의 약속이나 맹세를 신뢰하는 것이 더 부적절함을 안다. 어디까지나 우리는 여전히 무지하고 연약한 죄인이다.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더 나은가! 기도하면 가장 암담한 회의도 믿음으로 남고, 불신으로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확신에 차 있을지라도 우리 각자는 회의하는 자일 수 있으며, 그래서 회의하는 자의 이 기도는 우리 모두의 심금 울려준다.
사랑하는 주님,
비록 제 입장을 확신하지만주님 없이는 고수할 수 없습니다.
저를 도와주소서. 아니면 저는 무너집니다.
–마틴루터- (회의하는 용기, 290-291; 마지막 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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