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 시간에 책을 잘못 소개했습니다.ㅠㅠ <회의하는 용기 (God in the
dark)>라는 한국말 제목의 책은 오스 기니가 지은 것이고,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책은 <회의에서 확신으로(Doubt, handling it honestly)>입니다. 이왕 얘기가 나온 김에, 오늘 나눈 요한복음 14:1-14말씀은 물론 Q&A시간에 나눴던 대화들의 보충자료가
될만한 내용을 두 책에서 옮겨왔습니다. –하목사-
믿음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성실하심과 미쁘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격려와 인도하심을 받고 성령의 감화와 위로를 체험하게 됨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믿음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 본질상 이해를 갈구하기 마련입니다.
셋째로 믿음은 순종입니다. 바울은 믿음이 우리의 행동에서 드러나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믿어 순종케 하는 것”(롬1:5)에 관해 말하였습니다. 조셉 어디슨(Joseph Addison)은 “믿음은 우리 안에 살아 있어서 생각보다는 실천으로 힘을 모은다”고 말했습니다.
믿음은 철근 콘크리트와 같습니다. 강철 틀로 고정된 콘크리트는 일반 콘크리트와 비교해서 훨씬 더 큰 압력이나 압축에서도 잘 견딜 수 있습니다. 이해로 인해 더욱 강화된 믿음은 어떠한 압력하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믿음은 인간의 몸과 뼈와 같습니다. 마치 인간의 골격이 육체를 지탱하고 육체의 모양을 형성하고 강화하듯이 이해는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지지하고 모양을 형성해 줍니다. 골격이 없다면 인간의 몸은 가벼운 무게에도 버틸 수 없습니다. 몸이 성장하고 적절한 기능을 하려면 살과 뼈가 모두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체험의 활력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체험의 활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계속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믿음을 이해로 강화시키십시오. (회의에서 확신으로, 25-28)
회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워하고 민감하게 느끼는 주제입니다. 그들은 회의를 부끄럽고 불충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심지어 이단이나 되는 양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회의란 말은 입 밖에도 꺼내서도 안 되고 심지어 꺼낼 수도 없는 것처럼 취급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꾹꾹 눌러 놓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반대의 함정에 빠지기도 합니다. 즉 완전히 회의에 사로잡혀 삽니다. 회의가 그 사람을 압도해 버립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만 온통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회의는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위와 같은 방식으로 다룰 수가 없습니다. 적극적인 관점에서 볼 때, 회의는 영적 성장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회의는 당신의 믿음을 테스트하고 그것의 약점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또한 당신의 믿음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하도록 기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무조건 믿는다는 식의 태도를 벗어 버리게 합니다. 회의는 당신을 자극하여 당신과 하나님의 관계의 기초를 더욱 공고히 다지도록 만듭니다. (회의에서 확신으로, 143)
기독교 신앙의 영광스러운 일면은 그 핵심에 인격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다…회의에 대한 건강한 이해는 믿음에 대한 건강한 이해와 나란히 짝을 이뤄야 한다…믿음이 회의의 부재는 아니지만 그러나 회의의 그림자 너머에 진정한 믿음의 확신이 존재한다.
첫째, 회의에 대한 건강한 이해는 오늘날 쓸데없이 만연한 신앙 붕괴에 대해 방벽역할을 한다. 가장 해로운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회의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회의에 대한 솔직함과 회의의 해법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달려져야 한다.
둘째, 회의에 대한 건강한 이해는 장차 분명히 다가올 시험의 날에 대비해 우리를 준비시켜 준다. 진정한 의미에서 믿음이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이해에서 태동한 확신이며, 하나님의 실체와 말씀과 행위의 진리에 견고한 기초를 둔다. (회의하는 용기, 15-19쪽)
일심의 믿음이라 해도 우리의 믿음이 실패하지 않으리라고 우리는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두 마음이 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누릴 수 없고, 그분을 의지할 수 없을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에 대한 우리의 회의의 시각보다 더 확실하시고 더 신실하시며 더 은혜로우신 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더 알수록 자신의 약속이나 맹세를 신뢰하는 것이 더 부적절함을 안다. 어디까지나 우리는 여전히 무지하고 연약한 죄인이다.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더 나은가! 기도하면 가장 암담한 회의도 믿음으로 남고, 불신으로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확신에 차 있을지라도 우리 각자는 회의하는 자일 수 있으며, 그래서 회의하는 자의 이 기도는 우리 모두의 심금 울려준다.
사랑하는 주님,
비록 제 입장을 확신하지만주님 없이는 고수할 수 없습니다.
저를 도와주소서. 아니면 저는 무너집니다.
–마틴루터- (회의하는 용기, 290-291; 마지막 문단)
매우 흥미로운 Q&A 시간이었던 것 같네요 :)
답글삭제자세한 설명에 감사드립니다-